추억

뒷모습 (주자청) 을 읽고 나의 아버지를 추억하다

meja 2023. 1. 19.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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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청의 뒷모습은 청년시절인 20대 때 아마도 세종로 새문안교회 맞은편  숭문 서점이나 종로에  종로서적에서 구입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배영이라는 제목으로 아주 유명한 수필로 많은 젊은이들이 읽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아끼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나 자신의 뜻이 있어서이다. 이제 60대 중반을 지나가는 나이에 다시 꺼내 보는 기분이 예사롭지 않다. 이 수필의 저자가 느끼면서 써 내려간 뒷모습 속에서 많은 공감과 그리움이 묻어날 만클 세월이 흘러 그동안 책꽂이 귀퉁이에 꽂혀 있던 것을 이제는 자주 보이는 위치로 이동하여 보관하고 있다. 

 

 

주자청의 수필집표지(뒷모습)

 

아버지께서는 고향이 북한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한국전쟁 1.4 후퇴때 본의 아니게 포로가 되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풀려 나서 제주도(모슬포)에서 위생병으로 군생활을 하시고 여동생(나의 고모)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포로가 되어 내려올 때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해군 유디티(UDT) 지원용 상륙정을 타고 이동하셨다고 했다. 그 배안에는 쥐도 있고 몸에는 이도 있었다고 하셨다. 나로서는 그냥 무용담으로 들었지만 당신께서는 생사를 오르내리는 경험과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포로수용소생활 또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로 북쪽(공산주의)과 남쪽(민주주의)으로 나뉘어서 밤마다 싸움을 하여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다고 한다. 역사를 보면 그 당시에 포로수용소 소장(Dodd 준장)이 납치될 만큼의 위협적인 상태에 이르렀으니 일반 반공포로의 목숨은 하찮은 존재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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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의 첫장(주자청)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말이 없으시고 자식에 대한 애정표현이나 꾸지람도 전혀 없으셨다. 어느 날인가 당신께서 고향 산천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약산과 동룡굴 , 묘향산과 구장읍등 고향에 큰 지명과 우리도 알만한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어릴 적 놀던 이야기도 해주셨다. 듣던 중에 그저 호기심반 기대반으로 들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아련한 서러움과 눈시울이 붉어진다.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매한대도 맞지 않고 큰 나로서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는데 지금에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대단한 참을성이 아니면 넓은 관용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힘든 실천이었다. 국민학교 5-6학년 시절에는 아버지 직장이 미군들과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영어 몇 마디 정도는 하셔서 영어 공부하라고 그 당시 미군속으로 있는 여성아나운서와 미국인의 회화가 녹음된 디스크를 사주시면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뒷모습 끝장(주자청)

비록 아버지께서는 말은 하지 않으시면서 자식을 위해 적지 않은 놀걸이를 만들어 주셨는데 집 대문앞을 나가면 바로 철봉대를 만들어 턱걸이연습을 할 수 있게 하여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체력장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겨울이면 촌에서는 놀만한 시설이나 도구가 없는데 국민학교 6학년때는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하셨고 얼음 위에서  앉은뱅이 썰매와 서서 타는 한날로 된 썰매도 그 당시에 동네에서 일부만 가지고 있었고 날도 두꺼운 강철로 되어 튼튼하여 겨울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아들을 위해서 마련했다. 당신을 늘 말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했다. 이제와 느끼는 것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부모님을 그리워하셨을 것이다. 살아서 고향을 못 가본 안타까움이 나에게도 전해저 빨리 통일의 기운이 피어올라 북쪽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나 트레일러닝대회가 하루빨리 개최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데 나 또한 늙어 가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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